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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가 힘들다, 사이토 다마키외 지음, 전경아 옮김, 책세상 (머리말)

경제돌봄 2018. 5. 21. 13:55



나는 엄마가 힘들다

- 사이토 다마키외, 전경아 옮김, 책세상



머리말

제가 임상 현장에서 자주 통감하는 것이 모녀 관계의 특수성입니다.

그것도 패턴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아주 억압적인 엄마 아래서 고통받는 딸이 있는가 하면 엄마와 지나치게 밀착된 나머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해 갈등하는 딸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얼핏 사이가 좋아 보여도 부지불식간에 수면 아래의 썩은 부분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부자 관계도 크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문제의 양상’은 훨씬 단순합니다.

저는 이러한 모녀 관계의 특수성에 주목하여 <<엄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 - 왜 ‘엄마 죽이기’는 어려운 것일까?>>라는 책을 썼습니다. 물론 부모자식 관계에는 부자 관계도 있고 부녀 관계도 있고 모자 관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모녀 관계는 유독 이질적입니다. 최근에야 겨우 이루한 이질적인 면이 주목받기 시작해 주부잡지에 특집기사로 다뤄지거나 문제 관계에서 있는 당사자가 관련 행사를 열거나 책을 집필함으로써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여기에 이르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만큼 모녀 관계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만 모녀 문제를 주목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잡한 모녀 관계를 다룬 책은 서구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편적인 문제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대부분의 남성은 이런 문제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부 관계’의 어려움은 상상할 수 있어도 ‘모녀 관계’의 복잡함까지는 상상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실은 저 자신도 말로는 이해한다 하면서도 여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례한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공감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다’는 생각으로 그저 ‘남의 일’보듯 호기심에서 이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해당 분야에서 어느 정도 지식과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발언해야 마땅하지만 제가 감히 나서게 된 이유는 이 영역에서 남성의 시간이 주제가 된 연구와 저작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졸저는 “남자치고는 그럭저럭 잘 썼다”정도의 평가는 받은 듯합니다만, 당초 예상보다 더 널리 읽히며 저 역시 ‘엄마의 딸’을 주제로 한 강연에 강사로 초빙될 기회가 늘었습니다. 모녀 문제를 겪고 있는 당사자들의 공감과 납득된다는 의견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반면 “그건 아니다”라는 비판과 반론은 이제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저의 문제 제기와 분석이 빗나가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책은 <<엄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에 이어 엄마와 딸을 테마로 하는 저의 두 번째 저서입니다. 지난번 책을 쓸 때 참고로 했던 저자, 혹은 지난번 책을 출판한 후에 그 존재를 알고 꼭 한 번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분 등 총 다섯 분과 대담을 진행했습니다.

다부사 에이코 씨는 자신이 겪은 모녀 갈등을 만화로 그렸는데, 대담을 통해 당사자로써 느꼈던 고통과 갈등에서 빠져나온 경위, 나아가 치료에 대한 힌트까지 주셨습니다. 가쿠타 미쓰요 씨는 모녀 관계를 생생하게 모사한 소설을 몇 권 쎴는데, 주로 모녀 관계와 모자 관계를 대비시켜 느낌의 차이를 설명해주셨습니다. 하기오 모토 씨는 걸장 <<이구아나의 딸>>을 중심으로 실제 경함한 어머니와의 귀중한 일화들을 들려주셨습니다. 노부타 사요코 씨와 같은 치료자 입장에서 복잡한 모녀 관계에 대해, 여성과 남성이라는 시간으로 각자 의견을 주고받으며 논의했습니다. 미나시카 기류 씨는 약간 특이한 본인의 모녀 관계에서 가족사회학적인 관점으로 시각을 확장해 여성과 가족 문제를 흥미진진하게 분석해주셨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남성의 관점으로는 도처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의견과 지적을 듣고, 이전 책보다 더 깊은 논의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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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대담을 읽기에 앞서 이 책의 전제가 되는 논지를 간단히 설명해 두려 합니다. 이 문제는 상호의 입장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서 단순한 사실과 증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적 발상을 토대로 엄마와 딸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간단히 기술해보겠습니다.

제 주장은 꽤 단순합니다. 왜 모녀 관계가 특수한가? 그 이유는 쌍방이 ‘여성의 몸’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남성도 몸을 공유하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분도 있을 텐데요, 감히 단언하건데 정신분석학적관점에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남성은 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건강한 남성의 몸을 말하자면 ‘투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질별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들이 일상적으로 자신의 몸을 의식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이론이 있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논의는 남녀의 성을 추상화한 상태에서 남성은 마음 구조상 자신의 몸을 의식하기 힘들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반면 여성은 일상적으로 자신의 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 원인은 월경을 비롯해 신체적인 위화감을 느낄 기회가 남성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 첫 번째로 꼽힙니다. 저혈압이나 변비, 현기증, 두통 등 부정수소를 않는 비율도 남성보다 현저히 높습니다. 매일같이 몸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요인은 성 편견입니다. ‘여자답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몸짓이나 말투, 혹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이나 몸가짐 등 다양한 이미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여성을 여성답게 키운다는 말은 여성스러운 몸을 기른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다정함’이나 ‘단아함’,‘나서지 않고 한 발 물러서는 태도’등 추상적인 ‘여성다움’도 있는데, 이는 남성적 가치관(‘논리적임’,‘의연함’,‘적극성’ 등)과는 상반된 특징이 대부분입니다. 바꿔 말하면 주체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포기시키는 방향인 셈이지요.

이상을 간단히 정리하면 ‘여성다움’의 범주에는 두 가지 모순된 성향이 보입니다. 즉 타자에게 욕망당하는 ‘여성다운 뭄’을 획득하는 쪽과 자신의 주체적 욕망을 억누르면서 ‘여성다운 몸’을 획득하는 쪽과 자신의 주체적 욕망은 억누르면서 ‘여성다운 태도’를 일관하는 쪽입니다. 이때, ‘욕망’에 관해 전자는 긍정하고 후자는 부정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이 ‘여성다움’이 내포하는 역설이 여성 고유의 공허함과 우울함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여성다움을 지향하는 ‘훈육’의 핵심은 여성다움 몸과 태도를 기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습니다. 즉, 딸에 대한 엄마의 훈육은 딸의 몸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지배함으로서 시작됩니다. 그 목적인 정상적이든 비정상적이든 모녀 문제의 발단에는 이런한 ‘신체적 동일화를 통한 지배’가 있다는 점에 주의하세요. 이런 특성이 모녀 관게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모자, 부녀, 부자 관계에서는 이런 속성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딸에 대한 엄마의 지배는 몇 가지 형태를 띱니다. 그중에서 ‘억압’, ‘헌신’. ‘동일화’ 세가지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가장 노골적인 지배인 ‘억압’은 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금지만이 아니라 다양한 말이 포함됩니다. 하기오 모토 씨의 <<이구아나의 딸>>을 보면 어릴 때부터 쭉 엄마에게 이구아나라 불린 딸은 자신을 이구아나로빡에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때, 딸의 몸을 만드는 것은 엄마의 말입니다. 그 말이 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침에도 엄마는 ‘너를 위해’, ‘네가 잘되라고 생각해서’한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엄마가 딸에게 하는 말은 무의식적으로 가기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즉, 엄마가 본인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지요. 이때 ‘엄마의 말’이라는 회로를 통해 엄마의 몸이 딸에게 전달됩니다. 모든 딸들의 몸에는 엄마의 말이 주입되고 새겨진다 해도 과넌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딸들은 엄마를 부정하지 못하고 엄마의 말을 고스란히 따르며 살아가게 됩니다. ‘엄마 죽이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런 ‘내재된 엄마의 말’을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헌신’하는 지배도 있습니다. 엄마가 항상 고압적인 금지와 명령을 통해서만 딸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도 헌신적인 선의를 바탕으로 한 지배도 있습니다. 딸의 학비를 벌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엄마, 딸이 자립하고 난 후에도 수시로 연락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엄마... 이런 선의를 정면에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지배라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려 하면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이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임상심리사 다키이시 고이치씨는 이런 지배 형태를 ‘마조히스틱 컨트롤’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아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지배가 거의 통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엄마의 헌신에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젠더격차’가 생깁니다. 아니면 딸들이 느끼는 죄책감이란 신체적 동일화를 통해서만 생기는 특이한 감각인지로 모릅니다.

‘동일화’란 간단힌 말해서 딸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기에서는 ‘억압’과 ‘헌신’이 모두 포함됩니다. 여기서 엄마의 이기심이 가장 강하게 발휘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딸이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지만 일단 이런 지배가 성공하면 ‘일란성모녀’가 완성됩니다. 동일화가 진행되고 나면 서로 간에 지배-피지배라는 자각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세포 차원에서 몸이 융합된 상태죠.

지배가 싫으면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나요? 따로 떨어져 살거나 거리를 두는 것이 유효한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엄마의 지배에 저항하든 복종하든 여성은 특유의 ‘공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저항하거나 도망친 딸은 해방감을 갓보는 동시에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심한 대유를 받으면서도 엄마 곁을 맴도는 딸들이 많은 이유는 그러한 까닭입니다. 동일화를 거친 지배를 통해서도 ‘세포 융합’은 일어나거든요. 모녀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엄마 죽이기’가 ‘자기 죽이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단언만으로는 무책임합니다. 지난번 책에서 제가 제안한 해결책은 ‘문제 인지하기’입니다. 일단 알고나면 조금이나마(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멀어지기’가 가능합니다. 이때, 아버지와 파트너 등 ‘제삼자의 개입’도 유효합니다. 모녀 관계는 폐쇄된 환경에서 일그러질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요. 솔직히 지난번 책은 아버지와 남편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저 같은 남성들이 모녀 관계의 복잡성에 놀라고 때로는 개입 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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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을 마치고 보니 이 문제에 대해 제가 원하는 만큼의 이해와 해결책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아주 벗어나지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사자, 작가, 연구자 등 다양한 입장에서 이 문제와 씨름해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지난번 책에서 부족함을 느꼈던 공감성이나 여성적 시점 등을 충분히 보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런 종류의 책을 처음 읽는 분은 물론, 저의 지난번 책을 읽었던 분들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이 모녀 문제를 겪는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고, 엄마에게 지배당하는 ‘엄마의 딸’에서 벗어나는 길로 이끌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시이토 다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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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와 누나

나의 동반자와 장모

나의 동반자와 딸

뒷짐지는 제3자가 되지는 말아야지.